아슬한 어둠을 뚫고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렸다. 새벽에 집 밖으로 나오니 정신을 바짝 들게 하는 차가운 공기가 코 속을 밀고 들어 왔다. 시동을 켜자, 어김없이 낯익은 음악이 흘러나온다. 여러 장르의 음악과 따뜻한 이야기가 좋아 스스럼없이 친구를 맺은 방송이다. 물론, 일방적이다. 시작할 때부터 듣진 못하지만, 출근하면서 끝까지 들을 수는 있다. 분명 색다른 감정의 교류이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신선하고 생생하다. 어찌 됐든, 이제는 뗄 수 없는 관계가 돼 버렸다. 새벽에 함께해주는 친구가 있다는 건 숨은 행복이다. 일방적으로 흘러나오는 음악과 이야기를 들으면서 혼잣말을 하는 거지만, 편안함과 따뜻함이 있다. 특히, 매주 수요일에는 책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는데, 아주 유익한 시간이다. 이번 주에는 52번째
언제 타올랐냐는 듯 앞산에 고운 잎이 다 졌다. 화려했던 단풍들을 보내고 벌거벗은 나무들만이 쓸쓸함을 감춘 채, 의연하게 서 있다. 달랑 한 장 남은 달력 앞에 마음이 분주하다. 요즘 교육청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쁘다. 각종 사업 마무리는 물론, 내년도 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지난주에도 큰 행사를 두 번이나 치렀다. 행사를 기획할 때면, 무엇보다 취지에 맞는 최대한의 지원과 대상자에게 걸 맞는 강사를 선정하는데 힘을 기울이곤 한다. 지난 주 행사 중의 하나는 특히, 어려운 시기에 학교경영을 하며 3월부터 굽이굽이 곡절을 돌아 지금까지 달려 온 교장선생님들을 위한 행사라서 더더욱 그랬다. 그동안의 틀에서 벗어나 색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분을 강사로 초청했다. 그 중 한 사람이 우리고장 출
나이 들면서 언젠가부터 까닭 없이 눈물이 날 때가 잦아졌다. 마음이 조금만 울컥해도 눈물이 핑 돌고, 날씨가 추워도 눈물이 흐른다. 나이 들면 다 그런 거라고들 하지만, 눈물은 정말 흘려야 할 때 울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남자는 태어나서 딱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속담 같은 그물에 사로잡힐 필요야 없겠지만, 쓸데없이 눈물이 나는 것 또한 난감한 일이다. 마음은 이러 할진데, 장엄한 가을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바라보노라면 울컥해지고 눈시울에 눈물이 어리어진다. 이것 또한 병이다. ‘눈물’은 인간에게 주어진 신(神)의 은총이고, 비애의 극한에서 나오는 인간성의 마지막 표현이라고 한다. 어느 시인은 “이 지상(地上)에 오직 썩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 것은 신 앞에서 흘리는 눈물뿐일 것이다.”
세상은 지금 그 시끄러움이 점입가경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늦가을의 풍경은 장엄하다. 곧 침몰할 것이라서 주체할 수 없이 더 황홀한 지도 모르겠다. 덩달아 나는 무엇을 한다 해도, 무엇을 쓴다 해도 그저 감동의 물결로 출렁이고 있다. 그러나 절정이 오히려 참혹을 부채질 한다. 희열이 더욱 우울을 불러들이기도 한다. 까닭 없이 슬퍼지면서 눈시울에 눈물이 어리어진다. 바야흐로 만추다. 오색 단풍 중에 최고는 단연코 참나무 잎이다. 핏빛처럼 붉은 애기 단풍도 물론, 아름답다. 허나 참나무 잎만 할까.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참나무는 황금빛으로 가을 산을 빛나게 해준다. 채도가 높은 연한 노랑에서 황금빛으로 변하고, 몇 번의 서리를 맞으면서 갈 빛으로 깊어져간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길을 걷노라면 겨울부터
시월이 이렇게 저문다. 상강 절기를 기점으로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더니 가을비가 부쩍 잦다. 가을비 한 번에 내복 한 벌이라 했던가. 단풍은 절정을 달리고 있는데, 온전히 느낄 겨를도 없이 겨울로 접어들 것 같아 안달이 난다. 올해도 달랑 두 달 남았다. 참 빠르게 많이도 달려왔네. 언젠가부터 어제일도 오래 된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없지만 지나 온 일들이 안개 빛으로 수런인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 했던가. 그렇게 그렇게 살아 온 날들이 아련하다. 10월은 정말 바쁜 달이다. 행사들이 넘쳐나고, 각종 사업들을 추수하며 내년도 계획을 위한 의견수렴 등으로 여기 저기 바쁘다. 지난주는 유독 더 그랬다. 바쁜 와중에 큰 행사를 마치고,
지난 주 금요일 비 내린 후 확실히 달라졌다. 기온이 한 자리 수로 떨어지고 서늘한 날씨가 이어진다. 끈덕지던 더위가 물러나고 비스듬하게 누운 가을 햇살이 너무 좋다. 지난 주말에 가을 빛 따라 부안 변산 해안도로 거쳐 내소사 개암사에 들렀다. 어느 곳을 가든 산들거리는 바람결에 구절초꽃잎 기지개 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보다 보고 싶었던 코스모스 길 따라 오는 길이 참으로 행복했다. 지평선축제, 벽골제로도 유명한 김제의 코스모스 길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만경 가는 국도에 발길을 멈췄다. 나는 매년 이 길을 한 번은 꼭 만난다. 코스모스 길을 걸으면서 가을을 제대로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꽃잎을 몇 장 따 머리에 꽂은 채 사진을 찍었다. 어릴 적 신작로 갓길에 피어난 코스모스 꽃을 머리에 꽂고
벌써 9월의 마지막 주다. 시간은 휙휙 잘도 간다. 더위가 주춤하는가 싶더니 떠나기 전 몽니를 부려보는 듯 10월이 코앞인데도 덥다. 일기예보는 마지막 더위라 한다. 여름과 가을, 공존의 계절이 드디어 막을 내릴 모양이다. 이제부터는 가을 본연의 날씨가 열릴 것이라 하니 끝물 더위쯤은 참을 만하다. 월요일은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언제나 버거운 날이다. 지난 주말, 몇 주째 방치해 두었던 뜰 청소를 몰아 한 탓인지 여느 때보다도 출근길이 힘겨웠다. 그런데다가 아침부터 죽음 소식을 두건이나 접하니 힘이 쭉 빠졌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지인들의 자혼 소식 못지않게 망자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럴 때면, 살아있다는 것이 참으로 무색해진다. 더군다나 친족이나 지인의 죽음 소식은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축복은 그 숨 막히는 무더위 속에 있었던 것임을 여름의 끝물에 한 알의 포도 알을 깨물면서 문득 알게 된다. 수많은 과일들을 지상에 차려 놓고 힘센 여름은 물러가고 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아침저녁으로 쫄깃해진 공기. 하늘은 높아지고 너머 너머의 강이 말을 걸어오고 강물처럼 그리움도 깊어간다. 그렇게 8월이 가고, 백로 지나 추석이 문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오랜만에 대전에서 귀한 손님들이 오셨다. 일 년에 두 세 차례 찾아올까 말까하는 분들인데 반갑게 맞이하질 못했다. 지난 9월 인사에서 옆자리로 옮긴 탓에 바쁘다는 핑계로 차 한 잔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맘에 걸린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분이 식사자리를 마련하고 초대까지 해줘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자리에서 함께 식
확실히 달라졌어요. 공기와 바람이. 미세하지만 느껴집니다. 나만 그런가 싶어 옆 사람에게까지 묻습니다. “좀 달라진 것 같지 않아요” 구지 동의를 구하는 이유는 뭘까요. 말복이 지나고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한풀 꺾이면서 제법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는 처서를 앞두고 있다. 처서가 지나면 풀도 더 자라지 않고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고 하니. 절기란 게 참 묘하다 싶다. 하늘은 점점 높아지겠지. 강물처럼 그리움도 깊어질 거야. 어쩐지, 시(詩)한입 베어 무니 눈물이 핑 돌더라. 가을이 오고 있는 것 맞다. 한여름 심벌즈를 난타하듯 금속성을 내며 찌르릉거리는 햇빛 속에서도 가을은 오고 있었던 거야. 가을이 오면, 절로 고운 시선을 살려내고 싶어진다. 무심함 때문에 잃어버린 일상의 아름다움을 되찾고
어떤 방식이 됐던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은 설레고 홀가분해지는 일이다. 지난 달 말, 십여 일 국외 출장을 다녀왔다. 웃어른과 함께 하는 자리라서 이모저모 조심스럽고 마음이 가볍진 않았지만 일상을 떠난다는데 더 큰 의미를 뒀다. 나는 제법 여행을 즐기는 편이다. 여행은 좋은 멈춤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떠나면서는‘다녀와서 뭘 해야지’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롯이 그 시간을 즐길 뿐이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힘 있지도 가냘프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다녀오면 신기하게도 다음 길이 보이곤 했다. 미리 계획하거나 궁리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이번 출장도 여행길로 간주했다. 해외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휴대폰을 최대한 만지지 않으려 애썼다. 한국의 속도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부담을 버리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냥 흐르
뜨거운 햇빛과 30도를 훌쩍 뛰어넘는 무더위가 연일 이어져 장마가 끝난 줄 알았다. 한데 주말에 다시 커피를 볶듯, 후드득 후드득 비가 내렸다. 장마는 아직 진행 중이지만 이젠 끝물이지 싶다. 장맛비에 젖는 모든 것들이 제 몸의 상처를 감추지 못하는 날. 내 머리 속은 덩달아 엉킨 실타래라서 한잠 자고 생각하자며 낮잠을 청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냥 책이나 읽을까(?) 주변을 둘러보니 오랫동안 방치된 책들이 무표정하고 뜨악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짬나는 대로 읽겠다는 욕심 하나로 집안 곳곳에 책을 뿌려두는 건 또 다른 취미이자 습관이 됐다. 그러고 보니 집에서 책을 읽은 지가 한참이다. 사무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침저녁으로 내달리며 급급하게 산다는 핑계를 잡아 주말에도 시간을 무심히 소홀하게 보냈다. 상
마른장마 끝에 호우를 동반한 장마전선이 북상함에 따라 전국에 장맛비가 쏟아지고 있다.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비 내리며 세상이 온통 습하다. 어디선가 어둑신한 헛간냄새도 흘러온다. 우리 동네는 호우경보라며 전국 뉴스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엊그제 새벽 출근길은 군데군데 폭우였다. 윈도 브러시가 미친 듯이 움직여도 앞이 보이질 않았다. 줄 창 울고 싶었는데 참고 참은 눈물인지. 누구의 기막힌 슬픔일까. 나도 울면 저렇게 쏟아질까. 비상등을 켠 채, 얼음 자세로 운전하면서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일터 가까워질수록 빗줄기가 약해져 무사 출근할 수 있었다. 창밖에 풍경으로 앉아있는 용봉산 허리를 뿌연 안개가 감싸고 있다. 산자락에서 오랫동안 식당을 운영해 온 사장님한테 언젠가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안개가 용
장마전선이 뒤로 주춤했다. 비는 내리지 않고 무더위가 끈적끈적하다. 이열치열 뜨거운 차 한 잔을 마시며 우연히 내게까지 건너온 수필집을 얼핏얼핏 읽는다. 은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수필가를 대신해 가족들이 펴낸 유고집이다. 내겐 산수국보다 수국이 낯익다. 우리 집 쪽 마당 귀퉁이에 기척 없이 앉아 있다가 어느 날부터 꽃을 피우고 색깔까지 바꿔가며 변신하는 여름 꽃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 수국은 지금 한창이다. 산수국이란 이름은 수필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식물에는 나름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께나 했었는데, 이런 불명예스러울 때가 있나. 검색창을 두드려 보니 이름만 몰랐지 정원이나 공원에서 만났던 여름 꽃의 대표 주자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교직초임시절 인근에 있던 광릉수목원에서 보았
오월부터 시작된 무더위가 유월 접어들면서 기승을 부리더니만 바람 불며 비가 내린다. 일기예보는 남쪽에선 벌써 장마 시작이라 한다. 아마도 지금 내리는 비는 여름 머리쯤을 적시는 비일 게다. 이왕지사 내리는 비를 타고 한없이 내려라. 버석거리던 세상이 추적추적 젖고, 풀풀 먼지 일던 마음이 촉촉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일을 덮고 창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다. 바람에 실려 온 빗방울들이 하염없이 창문에 부딪히며 흐른다. 흑백영화처럼 번져오는 뻐근한 그리움. 이렇게 비오는 날엔 마음에 꼬깃꼬깃 접어둔 누군가 보고 싶어진다. 때로는 명함처럼 지갑 속에 갇힌 사랑도 있나니. 비가 내리면 평소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바깥세상은 물론이고 몸도 마음도 어느새 우울 모드로 전환돼 버린다. 함부로 그린 생각
오늘도 어김없이 달렸다. 서해안 고속도로로 통근한지 일 년이 다 돼간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익숙해지기는커녕 늘 낯설고 두렵기만 하다. 커다란 트럭들의 행렬이 그렇고, 때론 빛의 속도로 내달리는 차들은 정말 무섭다. 십여 년, 전 대전으로 통근하던 시절이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땐, 힘이 드는지, 무서운지도 모르고 다녔었다. 그런대로 운치란 놈도 있었다. 모시의 고장 한산을 거쳐 임천 강경으로 가는 구불구불하던 그 길. 속력은 낼 수 없었지만 사계절의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있었다. 요즘 구부러진 길을 찾기란 쉽지 않다. 새로 나는 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부분의 길들이 직선으로 쭉 뻗어 있다. 그러다보니 특별한 곳을 찾지 않는 한 오솔길 같은 길을 만나기
어느새 오월의 마지막 날이다. 이른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이제 유월, 단오 지나고 하지 넘으면서 계속 더울 일만 남았는데 큰일이다. 무성해진 숲을 바라보며 화가 모네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러나 결국 그를 실명(失明)의 고통에 빠뜨린 빛에 대해 생각한다. 생(生)이란 어쩌면 이토록 가혹한 건지. 가장 사랑하는 것이 왜 가장 큰 아픔을 주는지를 묻는다. 피천득 시인은 의 끝자락에서‘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오월이 가고 유월이면 목필균 시인의 이 떠오른다.‘한 해 허리가 접힌
독서의 계절이라 하면 흔히 가을을 떠올리게 된다. 구지 독서를 하는 계절이 따로 있어야 하는 지는 의문이다. 요즘처럼 나뭇잎들이 예쁜 계절에 눈부신 햇살이 은은하게 떨어지는 나무 그늘 아래서 책을 읽는 상상만 해도 싱그럽다. 바쁜 일상에서 독서를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시간 날 때마다 짬짬이 책을 읽는‘짬 독서’의 습관을 들이는 것도 괜찮다. 주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루에 한 장이라도 읽는 습관을 들이면 된다. 하지만 처음부터 지나치게 완독을 목표로 삼지 말아야 가능하다. 조직 속에서 일하다보면 자아와 영혼을 대면할 시간이 없다. 짬짬이 내 시간을 챙기지 못하면 조직 속에 일몰되기 십상이다. 내면 깊숙이 자리한 진짜 나와 마주 앉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겐 그런 시간이 짬 독서시간이
몇 차례 격하게 다녀 간 봄비 덕분으로 연두 빛은 더욱 진해졌다. 나무들이 제일 예쁠 때다.‘초등학교 입학식 날처럼 모두들 제 빛깔로 이름표 달고 서 있다, 라던 어느 시인의 표현이 새삼 왜 그리도 절묘한지. 요즘 산을 바라보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다 타버린 연탄재처럼 번 아웃된 가슴으로 젊음 만발한 연두 빛 에너지들이 흘러들어온다. 가슴 두근거림, 선홍빛 부끄러움, 야릇한 흥분 모두 다 돌아가고 싶은 양지의 딱 그 때다. 지난 주 좁은 마당에 쭈그려 앉아 어느새 일어선 풀들을 뽑고 있노라니 라일락 꽃향기가 스멀스멀 내 코를 점령해버렸다. 그도 모자란 듯 아예 내 몸 속으로 걸어 들어와 꽃이 피었다. 주말 내내 꽃은 지지 않고 지금껏 향기를 내품는다. 자연과 가까우면 어느새 나도 풍경이 된다. 사람들
한 주간 해외 출장을 다녀오고 나니 세상이 온통 꽃 천지였다. 시절을 당긴 색색의 꽃들이 앞 다투어 피어나 온갖 향기를 뽐내고 있다. 덕분으로 두 눈이 한껏 호사를 누린다. 사월은 벚꽃과 복사꽃이 흐드러지고 목련과 유채꽃이 마음을 적신다. 젊은 베르테르를 생각하며 사월의 노래를 부른다.‘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봄바람이 귓불을 간지럽힌다. 살아있음이 감동이다. 해외출장지에서 잠시 발열이 돋고 몸이 좋지 않아 이국 땅 병원에 눕고 보니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약발(?)이 잘 받아 몇 시간 만에
봄은 봄이로소이다. 꽃샘추위를 청산한 봄빛 고운 삼월이다. 나무마다에 꽃망울이 터지고, 새순들이 움 솟는다. 둘러보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곁에 있다. 주말에 봄맞이 마당 청소를 했다. 긁고 뽑고 다지고 반나절 이상 공을 들였지만 그렇게 크게 표 나진 않았다. 시골 단독에 살며 늘 느끼는 것이다. 아무리 치우고 정리해도 그저 그렇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덜 뽑고 덜 정리된 채로 사는 법을 나름 터득해 그냥 즐기고 있다. 봄빛에 졸고 있는 담장 아래 작은 꽃씨를 감추고 물을 주었다. 잊은 듯 살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연두 빛 새잎 물고 흙이 일어나겠지. 솔바람 살금살금 봄빛 안고 말갛게 씻은 햇살 따라오는 봄 이야기들로 우리 집 작은 뜰도 수런댈 것이다. 지금도 산수유, 청매화 아래로 이